일요일 오후, 아이가 문제집 한 페이지 풀고 저를 보며 "10 번이면 게임이지, 3 번 남았어" 라고 했어요. 제가 진짜로 그렇게 말했는지, 한 거 같기도 안 한 거 같기도.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마 아니겠죠. TodoBank 는 아이와의 약속을 부모의 기억이 아니라 통장에 저축해 두는 앱이라, "몇 번 남았는지" 가 잔액으로 보여요. 의욕 없는 날은 잔액에서 인출하고, 전체적으로는 그래도 앞으로 갑니다.
일요일 오후. 아이가 문제집 한 페이지를 풀고 저를 보면서 말합니다.
"이거 10 번 하면 게임 하기로 했잖아. 3 번 남았어"
…그런 약속, 한 적 있나.
한 거 같기도 해요. 10 번이었는지 5 번이었는지, 게임이었는지 간식이었는지, 이제 기억도 안 납니다. 그런데 아이 안에서는 이미 사인된 계약이에요.
여기서 "그런 약속 한 적 없어" 라고 하면 거짓말쟁이 취급당하면서 폭발합니다. "아 맞다 맞다" 라고 넘기면, 조건이 조금씩 아이한테 유리한 쪽으로 다시 써져 가요. 어느 쪽으로 굴러도 제가 불리합니다.
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, 의외로 흔한 모양이에요.
아이는 자기한테 유리한 약속을 놀랄 만큼 정확히 기억합니다. 부모는 그 순간의 분위기로 "10 번 하면 알았어" 라고 던지고, 3 초 뒤에는 잊고 있어요. 기억력 시합에서, 그냥 지고 있는 거죠.
게다가 "했네 안 했네" 상황이 되면 부모는 이미 게임 끝입니다. 증거가 없으니까. 아이가 "했잖아" 라고 하면, 저는 "한 거… 같지 않은데… 모르겠네…" 정도밖에 못 합니다. 약해요.
포인트 카드의 "몇 개 더 사면 하나 무료", 본인이 지금 몇 개까지 채웠는지 기억하세요? 저는 못 합니다. 계산대에서 "2,000 원만 더 사시면 도장 찍어드려요" 라고 들어야 그제서야 떠올라요. 마일리지, 술자리의 말로 한 약속, 다 비슷합니다.
사람은 "보상까지 몇 번 남았는지" 를 머리 안에만 두면 관리를 못 해요. 그래서 가게가 카드에 대신 적어주고 있는 거죠.
그걸 아이한테는 "네가 알아서 기억해" 라고 요구하는 셈이라, 솔직히 좀 무리한 부탁입니다.
우리 집에서 만들고 있는 TodoBank 는, 그 "보상 약속" 을 부모의 기억이 아니라 통장에 저축해 두는 앱이에요.
하는 건 간단합니다. 통장 하나 만들고, 메모란에 약속을 적어둬요. "10 페이지에 좋아하는 간식" 이런 식으로. 아이가 한 페이지 풀 때마다 통장에 "예치" 하고요. 한 만큼이 잔액으로 쌓입니다.
"3 번 남았어" 가 부모의 흐릿한 기억이 아니라 잔액으로 보이는 거예요. 아이도 부모도 같은 숫자를 봅니다. "했네 안 했네" 가 안 생겨요. 통장에 적혀 있으니까.
우리 집 아이는, 기복이 있어요. 의욕 있는 날엔 5 페이지씩 막 하고, 안 되는 날엔 진짜로 한 페이지도 손 안 댑니다. 0 아니면 100.
그런 날은 잔액에서 "인출" 합니다. 어제 더 한 만큼에서 오늘 분량을 빼두는 거죠. 오늘 0 페이지여도, 잔액만 줄 뿐 전체적으로는 앞으로 갑니다. 0/1 의 체크리스트면 "안 한 날" 은 통째로 적자가 되는데, 저금이랑 상쇄가 되면 오늘은 쉬어도 한 주가 무너지진 않아요.
솔직히 부모 입장에선 매일 꾸준히 해주는 게 고맙죠. 근데 기복 있는 아이한테 "매일 같은 양" 을 요구하는 건, 제 사정이지 아이 사정은 아닌 거 같아서요. 전체적으로 가고 있으면 일단 OK 로 하고 있습니다.
이게 재밌는 건, 통장이 있으니까 왠지 잔액을 좀 키우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. 의욕 있는 날엔 정해진 양보다 조금 더 "예치" 하기 시작했습니다. "내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놀 거니까 오늘 미리 저장해 둘게" ── 제가 시킨 게 아니라, 본인이 먼저 말해요.
그거 스케줄 관리잖아요, 라고 생각했어요.
일로 치면 WBS 같은 거예요. "다음 주는 회의가 꽉 차니까 이번 주에 미리 땡겨두자" 랑 구조가 같습니다. WBS 가 없는 프로젝트는 매주 같은 양을 꾸역꾸역 안 하면 안 굴러가서, 안에서 보면 데스마치 같죠. 끝이 안 보이는데 매일 똑같은 거 반복, 진짜 디게 피곤한 느낌입니다.
제대로 된 스케줄 관리는 아이한테 아직 이르지만, "할 일은 미리 땡길 수 있구나" 를 몸으로 익히는 그 정도는 괜찮은 거 같아요. 의욕 있는 날에 많이 해두고 내일은 논다. 이거, 어른 되고도 한참 쓰는 기술이거든요.
겸사겸사 몇 가지.
아이가 "예치" 를 막 눌러서 잔액을 부풀리는 꼼수는 당연히 시도합니다. 그래서 예치에 비밀번호 걸 수 있어요. 안 걸어도 됩니다. 잊었거나 안 걸었어도 간단한 암산 문제로 통과되니까 아이가 완전히 잠기진 않아요.
이자는 안 붙습니다. 진짜 은행이랑 다르게 저축해도 안 늘어요. 대신 줄지도 않아요. 어제의 노력이 오늘로 이어진다는 거죠. 그것만으로 우리 집은 충분합니다.
계좌는 마이너스도 됩니다. "다음 주 분 미리 당겨오기" 같은 용법은 가능하지만, 마이너스 전제로 굴리면 결국 그 "다음 주" 가 힘들어지니까 적당히.
덤으로 부모 쪽 얘기. 아이가 저축에 재미 붙이면 부모도 신나서 "더 해보자!" 하고 자꾸 떠밀고 싶어지는데요, 너무 시키면 아이 의욕이 뚝 부러집니다 (경험담). 이것도 적당히.
이 앱이 평생 필요한 건 아니에요. 약속을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이런 앱은 안 써도 됩니다. 그때까지 부모 기억력을 받쳐주는 지팡이 같은 거예요.
(겸사겸사 제 기억력도 받쳐줬으면 좋겠는데, 그건 아마 다른 앱이 필요할 거 같고요)
그래서 오늘도 아이한테 "통장에 3 번 남았다고 적혀 있네" 라고 화면 보여주고, 제가 잊고 있던 약속을 슬쩍 이행하고 있습니다. 부모의 권위, 전혀 없어요. 뭐, 그런 거죠.